한국의 인구 구조가 바뀌면 소비의 우선순위도 달라집니다. 출산과 양육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키즈 케어’ 시장은 정체·재편 국면에 들어섰고, 동시에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돌보는 ‘펫 케어’가 일상 소비의 중심축으로 떠올랐습니다. 이 글은 데이터와 사례를 바탕으로 저출산이 만든 수요 이동을 정리하고, 산업·브랜드가 점검해야 할 체크리스트를 제안합니다.
저출산이 재편하는 소비 지도: ‘키즈 케어’의 축소·다변화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출생·사망 통계 잠정치에 따르면 2024년 출생아 수는 23만 8,300명으로 9년 만에 처음 증가했지만,
합계출산율은 0.75로 여전히 세계 최저 수준입니다.
2023년 0.72에서 소폭 반등했을 뿐 인구 유지에 필요한 2.1과는 큰 격차가 존재합니다.
출생아의 절대 규모가 작아진 만큼 유아용 식품, 완구, 육아 서비스 등 ‘키즈 케어’ 수요 기반도 구조적으로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실제 세부 품목에서도 감소 신호가 뚜렷합니다.
글로벌 리서치가 인용한 국내 베이비푸드 동향에 따르면
2017~2023년 사이 유아용 곡물·건식 식품의 물량은 342만 kg에서 119만 kg으로 줄었고,
분유(베이비 밀크) 매출액도 같은 기간 4,000억 원에서 3,215억 원으로 감소했습니다.
이는 ‘적은 출생아 수’라는 구조적 요인이 유아식 카테고리 전반을 압박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완구 업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업계 인터뷰를 인용한 보도에서는 “출산율 하락으로 장난감 수요 자체가 줄어드는 가운데,
알리익스프레스·티무 등 저가 직구 플랫폼의 부상까지 겹쳐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전합니다.
즉, 수요 기반 축소와 유통 경쟁 심화가 동시에 진행되며 전통적 ‘키즈 카테고리’의 매출 압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인구 구조 변화는 공간의 쓰임새까지 바꾸고 있습니다.
광주의 한 유치원이 요양시설로 전환되는 등, 어린이 중심이던 지역 인프라가 고령 친화 시설로 전환되는 사례가 관찰됩니다.
교육·보육 인프라의 재배치 신호는 ‘키즈 케어’ 관련 서비스 수요의 지역적 분포와 규모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다만 모든 키즈 카테고리가 일률적으로 감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프리미엄 영유아식·건기식, 친환경 소재·안심 성분 제품 등은 ‘적지만 더 좋게 사려는’ 지출 성향에 힘입어
선별적 성장을 보입니다.
그렇더라도 총 수요 풀이 줄어드는 환경에서 카테고리 내부의 ‘바꾸어 사기(트레이드업/다운)’가 두드러지는 점은 분명합니다.
핵심은 성장의 무게중심이 전체 확대가 아니라 ‘세분화된 틈새’에 놓였다는 사실입니다.
아이 대신 반려동물에 집중하는 생활화: 펫 케어의 대세화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는 인식과 시간·지출의 전환은 데이터로 확인됩니다.
2024년 기준 국내 반려인은 약 1,546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9.9% 수준에 달했습니다(가구 기준으로는 591만 가구).
이는 ‘거의 3가구 중 1가구’가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뜻이며, 소비·서비스 시장에서의 체감 비중은 그 이상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이용한 반려동물 관련 서비스는 ‘동물병원(80.4%)’이 가장 높았고 ‘미용(51.8%)’
‘반려동물 놀이터(33.2%)’ ‘호텔(16.0%)’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월평균 양육비는 13만 원(병원비 4만 3,800원 포함)으로 파악되었는데,
이러한 반복·고정 지출은 펫 케어의 ‘생활비’화(化)를 보여줍니다.
시장 사이즈도 커지고 있습니다. KPMG가 농림축산식품부 자료를 인용해 추정한 바에 따르면 국내 반려동물(펫) 시장은
2022년 약 62억 달러 규모이며, 2032년 152억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카테고리 내부에서는 사료·간식의 프리미엄화, 용품·미용·호텔 같은 서비스 다각화가 동시에 확산되고 있습니다.
품목 간 지출 우선순위는 ‘먹는 것’에 집중됩니다.
펫코노미 연관산업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월평균 양육비는 15만 4,000원으로 2018년(12만 원)과 2021년(14만 원)을 지나
꾸준히 상향했고, 지출 항목 중 ‘사료(31.7%)’와 ‘간식(19.1%)’이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이는 사람 먹거리와 유사한 ‘원료·영양·레시피’ 경쟁이 펫푸드로 빠르게 전이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무역 통계로도 프리미엄화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2023년 개·고양이 사료 수입액은 3억 7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11.45% 감소했지만,
이는 국산화·내수 생산 확대의 영향이 섞인 결과입니다.
동시에 원재료·기능성·휴먼그레이드 등 고급 제품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됩니다.
보험·금융 서비스도 붙고 있습니다.
2024년 상반기 기준 반려동물보험 보유계약은 13만 3천 건, 같은 해 말에는 16만 2,111건까지 늘었습니다.
아직 전체 반려동물 대비 침투율은 낮지만, 진료비 공개·상품 구조 개선 등
제도 변화와 함께 시장 진입 기업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리테일 현장에서는 ‘펫 > 베이비’ 역전 현상도 관찰됩니다.
일부 보도는 저출산 속에서 유아용품보다 펫 제품 판매가 더 커졌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는 ‘돌봄의 대상’이 아이에서 반려동물로 이동하는 생활상의 변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왜 ‘돌봄의 전환’이 일어날까?
첫째, 기회비용의 변화입니다. 주거비와 교육비, 경력단절 위험이 높은 환경에서 ‘자녀’라는 선택은 가구 재무에 큰 부담으로 인식됩니다. 반면 반려동물은 비교적 예측 가능한 지출로 사랑·돌봄의 보상을 즉시 제공합니다.
둘째, 시간 자원의 재배치입니다. 1~2인 가구·맞벌이가 보편화되면서 긴 시간과 고강도의 돌봄을 요구하는 육아보다, 일과 후·주말 단위로 루틴화 가능한 펫 케어가 생활과 어울립니다.
셋째, 정체성 소비입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산다’는 자기 서사의 표현이 소비를 이끄는 가운데, 반려동물과의 일상은 SNS에서 강력한 스토리텔링 소재가 됩니다.
키즈 케어 → 펫 케어로의 소비 이동: 산업·브랜드를 위한 체크리스트
① 세분화와 프리미엄의 결합
출생아 수가 줄어든 ‘키즈 케어’에서 볼륨 드라이브는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 ‘펫 케어’는 같은 예산으로도 체감 가치가 큰 프리미엄 제품에 지출이 모이기 쉽습니다. 펫푸드의 원재료·영양 설계, 기능성 간식, 저자극 케어 용품처럼 ‘명확히 좋아진 포인트’를 제시하는 제품이 성과를 냅니다. 식품·뷰티·헬스케어 기업은 자사 R&D 자산(원료, 제형, 레시피)을 펫 포뮬러로 확장하는 ‘크로스오버 전략’을 검토할 만합니다.
② 서비스화·구독화
조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병원·미용·호텔·놀이 등 서비스 이용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제품만으로는 반복 접점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정기 건강검진 + 사료/간식 구독 + 헬스 데이터 관리’ 같은 패키지형 모델이 유효합니다. 그 과정에서 보험·결제·멤버십과의 연동성이 중요해집니다. 진료비 공개 및 표준화가 확대될수록 ‘가격·커버리지 투명성’을 전제로 한 파트너십 기회도 커집니다.
③ 펫 휴머니제이션(Humanization)에 맞춘 스토리텔링
지출의 중심이 먹거리·건강·놀이의 ‘생활 품질’에 맞춰지는 만큼, 사람 제품에서 쓰던 영양·원산지·지속가능성 스토리를 펫 제품에도 동일한 깊이로 적용해야 합니다. ‘휴먼그레이드’ 원료, 알레르기 저감 레시피, 저탄소 포장, 재활용 가능 소재 같은 속성은 차별화 포인트가 됩니다. 동시에 반려동물을 ‘자녀’처럼 대하는 정서에 맞춘 커뮤니케이션 톤과 커뮤니티 운영(반려인 후기·체험단·산책 모임 등)이 효과적입니다.
④ 오프라인 경험 재설계
키즈 중심의 체험·교육 공간은 수요가 줄어드는 반면, 반려동물 동반 가능 매장·카페·숙박, 반려동물 놀이터·수영장 등은 늘고 있습니다. 쇼핑몰·카페는 ‘동반 동선’과 위생·소음 관리, 배변 스테이션 등 운영 프로토콜을 정교화할 필요가 있고, 지역 축제·체험형 마켓은 ‘반려동물 동반 프로그램’을 기획해 체류 시간을 늘릴 수 있습니다.
⑤ 데이터 기반 고객 관리
반려동물의 품종·연령·건강 상태·활동량은 구매 니즈를 예측하는 강력한 신호입니다. 산책 데이터(웨어러블·앱), 식사 패턴(급여량·알레르기), 건강 기록(접종·검진·처방) 등을 동의 기반으로 통합하면, ‘생애주기 케어’ 추천이 가능해집니다. 키즈 케어에서 축적된 생애주기 마케팅 노하우를 펫 케어에 이식하는 접근입니다.
⑥ 규제·표준의 변화에 동행
수의료 가격 공개, 보험 재가입 주기 조정 등 제도 변화가 빠르게 진행 중입니다. 이를 ‘리스크’가 아닌 ‘신뢰 구축의 기회’로 보고, 라벨링·성분 공개·클레임 기준·AS/환불 정책을 선제적으로 정비하면 차별화됩니다. 금융·보험사와의 상품 공동기획, 병원·미용과의 패키지 연계도 제도 변화와 함께 설계해야 합니다.
⑦ 키즈 브랜드의 전환 전략
유아용 카테고리를 전개해온 브랜드라면, ‘원료 안전성·저자극·세정력·살균·보관 안정성’ 등 기존 강점을 펫 케어로 확장하는 제품 포트폴리오를 검토할 때입니다. 다만 반려동물의 생리·영양 요구는 사람 영유아와 다르므로, 수의영양학·수의피부학 자문 체계를 갖추어 신뢰를 확보해야 합니다. 입증 자료(임상·공인 시험)와 표준화된 라벨링은 필수입니다.
요약하면, 한국의 저출산은 ‘키즈 케어’의 파이를 축소시키는 동시에, ‘돌봄의 주체’가 반려동물로 이동하는 소비 대전환을 촉발했습니다. 데이터는 출생아 감소, 베이비푸드·완구 수요 둔화, 반려 인구와 지출의 확대로 이어지는 흐름을 일관되게 가리킵니다. 앞으로 10년, 펫 케어는 프리미엄화·서비스화·보험/금융 결합을 축으로 생활경제의 한 축을 더 굵게 차지할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감성’이 아니라 데이터에 근거한 포지셔닝과 실행 로드맵입니다.